독일을 이야기하면 늘 ‘정확함, 체계, 완벽’이 세트로 따라옵니다. 자동차는 빛의 속도로 질주하고, 도로엔 속도 제한이 없지만 신뢰가 있고, 사람들은 우직하고 성실하며, 시스템은 강철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직접 살아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독일은 무엇이든 다 잘하는 나라가 아니라 계획에 포함된 일만 세계 챔피언급으로 해내는 나라라는 사실을. 계획 밖에 있는 일까지 척척 처리해 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다음 회의 안건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럼, 이들의 빈틈없는 체계가 가장 난감해지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1. 돌발 상황 대응력 : 시스템이 승인할 때까지 대기
정해진 플랜이 있으면 독일은 ICE 기차처럼 정시에 출발합니다. 하지만 한 번 열차가 취소되면 문제 해결보다 역 정보 시스템을 더 신뢰합니다. 한국인은 지도를 켜고 가능한 모든 우회 루트를 찾는 동안, 독일인은 안내 전광판 앞에서 생각합니다.
‘대체 열차 시간은 언제 업데이트될까?’
2. 소소한 일 처리 : 디테일 앞에서는 한 박자 더 천천히
우주 로켓 설계 같은 큰일은 척척 잘 해냅니다. 하지만 서류 오타 한 글자 수정하는 업무는 담당 부서 간 ‘협업 → 일정 조율 → 내부 문서화 → 순차 처리’ 순서를 따릅니다. 그리고 마음 급한 한국인이 가장 많이 듣는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Jetzt? Nein. Termin, bitte.” (지금이요? 아니요. 일정 잡아주세요.)
3. 눈치 문화의 부재 : 마음을 읽는 기능은 추가 설치 필요
독일인은 공감 능력이 없는 게 아닙니다. 설명서가 없어서 작동이 안 되는 것뿐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회가 아니라, 말해야만 이해가 시작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표정이 애매하면 오해보다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왜 그런 얼굴인지 설명해달라고 물어봐야 할까 말까?”
라는 내부 회의가 시작됩니다.
4. 디지털 전환 속도 : 종이 문서에 진심인 나라

미국이 AI 신기술을 출시하면, 한국은 베타버전을 쓰고, 독일은 우선 편지로 관련 공지를 발송합니다. 현금은 여전히 사랑받고, 문서는 출력되고, 서명은 변함없이 파란 잉크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들의 디지털이 느린 게 아니라, 디지털보다 익숙한 걸 더 신뢰하는 문화적 현상입니다.
5. 멀티태스킹 : 동시에 여러 개는 CPU 과부하
독일의 업무 시스템은 싱글코어 프로세서처럼 작동합니다. 작업 1개는 100% 집중하여 완벽하게 해결하지만, 처리해야 할 작업이 5개로 늘어나면 ‘순서표 만들기 회의 → 우선순위 문서화 → 처리 시작은 다음 달’로 미뤄집니다.
한국처럼 ‘동시’에 하면 빠르지만, 독일에서 ‘동시’라는 단어는 계획표에 없기 때문입니다.
6. 서비스 마인드 : 고객 감동보다 분류에 집착
식당에서 물 한 잔을 주문해도 옵션 질문이 쏟아집니다.
“탄산이실까요? 생수이실까요? 병이실까요? 컵이실까요? 0.25L, 0.75L 중 어떤 것을 원하세요?”
이들이 무심해서가 아닙니다. 이들이 정한 ‘요구 사항 정의 프로세스’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7. 스몰토크 : 침묵은 결함이 아니라 기본 기능
엘리베이터에서 말이 없으면, 한국인이나 미국인은 종종 분위기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독일인에게 엘리베이터 속 침묵은 어색한 순간이 아니라, 가장 편안하게 작동 중인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걸면, 독일인은 잠시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이 대화는…그냥 하는 잡담일까? 아니면 나에게 뭔가 요청이 시작되는 걸까?’
즉, 독일에서는 말이 없어서 불편한 게 아니라, 의도가 정의되지 않은 대화가 더 불안한 것입니다.
8. 완벽주의의 역설 : 완벽할수록 출발 지연

한국은 90% 준비되면 Go, 독일은 99.7% 준비되어야 Go. 그러나 Go 버튼은 서류 폴더 8페이지 뒤에나 있습니다. 때문에 독일의 강점인 완벽주의는 가끔 이런 결과를 만든다.
“플랜은 완벽했지만, 이미 늦었다.”
9. 칭찬을 대하는 자세 : 칭찬도 ‘출처 확인’부터 시작
한국에서는 상대를 칭찬할 때 감정을 듬뿍 담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고야!”, “완벽해!”, “역시 대단해!” 같은 표현은 격려와 응원의 자양강장제처럼 쓰이고는 합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곧바로 분석 모드가 켜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마치 컴퓨터가 새 파일을 받으면 자동으로 바이러스 검사를 실행하듯, 독일인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질문이 먼저 떠오릅니다.
“왜 최고라고 생각하셨나요? 구체적인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평가하신 건가요?”
즉, 독일인은 칭찬을 부정하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라, 칭찬의 근거와 맥락을 먼저 파악해야 마음이 편한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10. 규정 밖의 인간미 : 사람과 시스템의 온도차
겪어보면 독일인은 개인적으로는 참 따뜻하지만, 시스템 안에서는 철벽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외국인이 “이번만 좀 봐주세요”라고 하면 답변은 거의 이렇습니다.
“Das geht nicht.” (그건 안 됩니다.)
이 반응은 이들이 차갑거나 무정해서가 아니라, 예외가 생기면 책임 공백이 생겨버리는 상황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사람이 먼저’라면, 독일에서는 ‘절차와 책임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천천히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시스템이 고장이 난 것이 아니라 설계대로 제대로 작동 중인 것일 뿐입니다.
- 작성: 오이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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